독립운동을 하다 아홉 번이나 수감생활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가 여섯 번째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딸은 열세 살이었고 곁에 아무도 없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까지 감옥에 끌려갔기 때문이다. 홀로 남겨진 딸은 고아가 아닌 고아로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투옥된 지 2년 동안 그는 하루도 딸에게 편지 쓰는 것을 거르지 않았다. 아버지의 편지는 딸에게 살아갈 희망이었으며 버틸 수 있는 힘이었다. 딸은 그 편지로 강인한 정신력과 위대한 민족정신 그리고 올바른 세계관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 옥중 편지의 주인공은 인도의 첫 수상 네루이며, 딸은 인도의 위대한 여성 정치가 인디라 간디이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어떤..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님. 고결한 독립운동가이자 꿋꿋한 민족주의 사학자입니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힘쓰기도 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시고, 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시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돼 10년 형을 받고 뤼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릅니다. 감옥에서 8년째 되는 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모진 고문을 버티던 선생님은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일본 측에서는 선생님이 옥사하면 반일 감정이 더욱 거세어질 것이라고 염려해 친척을 보증인으로 내세워 병보석으로 출감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런데 신채호 선생님은 보증인이 된 그 친척이 변절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였기에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
독립운동과 민족 계몽운동을 위해 힘썼던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희망조차 짓밟힌 일본강점기에도 '대한 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며 많은 청년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 참교육자로도 대표됩니다. 어느 날 안창호 선생님은 청년들에게 강의한 뒤,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중에 한 청년이 우리나라에는 위대한 인물이 없다고 불평을 하며 말했습니다. "저는 시대를 이끌만한 지도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루빨리 계몽되어서 민족을 이끌고 일깨울만한 지도자가 어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안창호 선생님은 정색하며 그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정말 우리나라에 인물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자네를 비롯한 청년들이 인물이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네. 자네는 민족을 이끌만한 인물이 되기 ..
"나는 밥을 먹어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잤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일본의 실력을 모르는가?" "나는 일본의 실력을 잘 안다.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나라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갖기를 원한다." "그건 무슨 뜻인가?"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이웃인 우리나라를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다. 2천만에게 원한을 품게하는 것보다 우정을 가진 2천만을 이웃으로 두는 것이 일본에게 득이 될 것이다. 내가 우리나라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일제 식민지 때, 당대 경북 안동에서 이름을 날리 던 파락호 중에 퇴계의 제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의성 김씨 학봉파의 명문가 후손으로서, 학봉 '김성일' 종가의 13대 종손인 '김용환(金龍煥, 1887년~1946년)' 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노름을 즐겼습니다. 당시 경북 안동일대의 노름판에는 꼭 끼었고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다 걸고 마지막 배팅을 하는 주특기가 있었습니다. 만약 배팅이 적중하여 돈을 따면 좋고,그렇지 않고 실패 하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그의 수하 2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덮치는 수법을 사용 했습니다. 판돈을 자루에 담고 건달들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던 노름꾼 '김용환', 그렇게 노름하다가 종갓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아내가 ..
일제 치하에서 조국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한 청년이 빈손으로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철도건설 노동자로 일을 하다가 미국의 비옥하고 광활한 토지를 본 청년은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밀과 옥수수, 감자를 주로 키우는 미국에서 청년은 당당히 쌀을 재배하기 시작 했는데 때마침 쌀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빈 손으로 미국에 갔던 청년은 재미동포 최초의 '백만장자' 김종림으로 불렸습니다.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자 김종림씨의 마음 속에는 조국을 향한 그리움도 점점 커졌습니다. 철도노동자 시절부터 적은 일당을 떼어 독립을 위한 일에 기부하던 김종림 씨는 백만장자가 되고 나서는 혼자서 대한민국 공군을 세웠다고 할 정도로 독립운동을 위해 거액을 ..
뛰어쓰기도 없고 쉼표도 없고 마침표도 없는 글을 읽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입니다.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위에 글처럼 불편하고 답답한 문장을 읽고 쓰면서 지내고 있을지도 혹시 모릅니다. 1886년 7월 23세의 청년이었던 호머 헐버트는, 조선의 청년들에게 서양문화와 영어를 가르쳐 달라는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고 제물포를 통해조선에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조선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호머 헐버트는 조선인보다도 조선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조선에 들어온 지 3년 만에 '선비와 백성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 이라는 뜻의 '사민필지'를 편찬하였습니다. 이 책은 순 한글로 만들어진 조선 최초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의 한글 사랑은 대단했습니다. 어느..
1900년대 초반 중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남자배우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배우에게 어떤 영화의 섭외가 들어왔는데, 일본계 자금이 투자되어 출연료가 일반 영화의 몇 십 배 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본을 보자마자 거절했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모두 독립을 위해 싸우다 돌아가셨는데, 내가 어떻게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영화에 출연할 수 있겠습니까?" 1900년대 초반 중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남자배우 김덕린 씨는 독립운동가 김필순의 아들이었습니다. 돈으로 설득이 안 되자 훗날 일본 쪽에서는 협박을 하며 제국주의 영화에 김덕린을 출연시키려 했으나 김덕린은 독립투사의 아들답게 의연히 대처했습니다. "기관총으로 나를 겨눈다고 해도 결코 출연하지 않겠습니다." 김덕린은 비록 중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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