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수원화성은 조선 건축 예술의 최고로 손꼽히며 완성한 우리나라 성곽의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원화성은 효성이 지극한 정조대왕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는 동시에 세력을 분산시키려는 정치적 목적과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보통 이런 대규모 공사는 강제로 끌려 나와 갖은 핍박 속에 중노동을 강요당하며, 겨울에는 얼어 죽고 여름에는 지쳐서 죽는 불쌍한 백성들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조대왕은 달랐습니다. 축성으로 이주해야 하는 백성들에게 모든 이주 비용과 새 집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또한 부역에 동원된 모든 백성에게도 정확한 임금을 지급했습니다. 건설 현장에는 다산 정약용의 '거중기'라는 무거운..
정조 사후 19세기 초의 조선은 대내외적으로 격랑과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밖으로는 문을 걸어 닫고 안으로는 분출하는 요구를 누르기 바빴는데, 가장 큰 피해자이면서도 새 시대의 희망을 연 사람들이 있었으니 정약용과 그의 두 형, 정약전 정약종입니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학문에 전념했습니다. 앉아서 공부에만 전념하느라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뚫릴 정도였는데 ‘목민심서’가 그 결실입니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민중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삶과 직결되는 바다를 연구해 조선 최초로 해양 연구서 ‘자산어보’를 지었고, 정약종은 모진 고문 끝에 목이 잘리면서도 신앙을 지켰고 조선 최초의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를 저술했습니다. 신앙과 초월, 학문과 정치, 민중과 자연은 한 사람 안에 온전히 통합되어야 합..
정조가 했던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지역차별을 극복하는 통합의 정치였다고 합니다. 정조 이전에 가장 큰 차별을 받은 곳은 서북 지역과 동북 지역(평안도와 함경도)이었다고 합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끼고있는 이 지역은 일찍부터 한양을 중심에 두고 사는 경화사족이나 아니면 삼남지방의 유림들로부터 오랑캐인 여진족과 가깝게 지내는 무식한 사람들이라는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인식으로 조정에서는 북쪽에 사는 이들을 등용하기를 꺼렸고, 실제로 이 지역 사람들은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지역 사람들은 오랑캐와 비슷 하다는 인식을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이징옥과 이시애의 역모 사건이 발생하면서 차별은 더욱 심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세조는 이시애의 반란까지 진압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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