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1개 소대가 무더운 벌판 한가운데서 적에게 포위되었습니다. 병사들은 무더위와 갈증에 허덕였고, 이들에게 남아 있는 물이라곤 소대장 허리춤에 있는 수통 1개가 전부였습니다. 소대장은 마지막이란 마음으로 수통을 열어 병사들에게 건네주었고 병사들은 수통을 돌려가며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수통이 다시 소대장에게 돌아왔을 때 소대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물이 반 이상 남아 있었기 때문인데, 다음에 마실 전우를 생각하느라 병사들은 물로 겨우 입만 축인 것입니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있어 이들은 지원군이 올 때까지 모두가 살아 남았다고 합니다. 지금 이 땅에 많은 비로 인하여 아까운 생명을 잃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재민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우리가 가진 작은 것 ..
제2차 세계대전, 미국의 많은 젊은이가 군대로부터 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워싱턴 기차역에도 수백 명의 장병이 몰려들었고 그들을 보내는 가족과의 눈물겨운 헤어짐이 매일 있었습니다. 그 시민들 가운데 다리를 절면서 뜨거운 코코아 잔을 쟁반에 들고 늦은 밤까지 봉사를 하던 한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때는 직접 코코아를 끓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코코아를 따라주면서 "잘 다녀오세요. 그대들의 승리를 위해 하나님께 매일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한 젊은이가 말했습니다. "혹시, 대통령 아니십니까?" 코코아를 따라 주던 노인, 그는 바로 미국의 32대 대통령 루즈벨트였습니다. 육체의 불편을 무릅쓰고 밤마다 기차역으로 나와 훈련소로 떠나는 청년들에게 따뜻한 코코아를 나르며 봉사했던 것입니다. 섬..
재력가의 아버지, 귀족 집안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발레 수업도 받으며 배고픔과는 거리가 먼 유년 시절을 보내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아버지가 투옥되고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이 전쟁은 귀족 집안의 부잣집 딸이었던 소녀를 한순간에 튤립 뿌리로 근근이 끼니를 해결하는 가난한 여자아이로 만들었습니다. 가혹한 전쟁을 겪으며 기적으로 살아남은 이 소녀는 훗날 아주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는 '오드리 헵번'입니다. 오드리 헵번은 이후에 전쟁의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아들에게 편지로 남겼는데 다음의 글이 내용 중 일부입니다. 분명 전쟁은 끝났는데 내 인생은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전쟁 후에 먹고살기 위해 안 한 일이 없었단다. 그러다 우연히 된 영화 단역 ..
'크리스마스'하면 떠오르는 건 너무나 많지만, 그중 단연 1등은 캐럴이겠죠. 전 인류 역사를 통틀어 최악의 사건 중 하나였던 제1차 세계대전은 빨리 끝날 것이라고 많은 나라가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고 1914년 12월 24일 치열했던 전쟁에서도 크리스마스는 찾아왔습니다. 벨기에의 이프르에서 영국과 독일 간의 전쟁 중이었는데 가까운 거리에서 무인지대를 사이에 두고 극한 대치상황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독일군의 한 병사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캐럴을 불렀고, 그 소리는 아군 참호를 넘어 상대측의 참호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이를 들은 영국 군사들이 환호하게 되었고 노래를 다 끝마친 후 기적 같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양측의 수많은 장병들이 비무장 상태로 참호 밖으로 올라..
1939년 조지마샬이 미 육군 참모총장이 되던 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당시 미군의 병력은 고작 20만, 그러나 마샬은 전력 증강과 조직강화에 뛰어난 역량을 발휘해 5년 뒤 830만 명의 세계 최강의 군대로 만들었다. 조지마샬은 뛰어난 장교에도 불구하고 진급은 매우 느렸다. 그와 동갑인 맥아더가 4성장군으로 육군 참모총장일 때 그는 겨우 중령에 불과했다. 맥아더에 의해 매번 준장 진급이 보류되었던 그가 진급할 수 있었던 시기는 맥아더가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난 뒤였다. 그때 그의 나이 55세였다. 1938년 어느 날 참모총장 부관이었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는 군 지도자들은 미국의 약한 국방력을 걱정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 루즈벨트 대통령은 전투기 1만 대를 만들자는 의욕적인 제안을 한..
6·25 전쟁에서 연합군 중 프랑스군을 지휘하던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 중장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독일군을 상대로 나르비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맹장이었습니다. 전쟁 후 3성 장군까지 계급이 올라갔지만, 6·25 전쟁에 참전할 때는 5단계나 계급이 내려간 중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 유린당한 나라를 재건하던 프랑스는 해외에 대규모의 파병을 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 생각한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 중장은 제2차 대전에 참전한 경험 많은 예비역을 주축으로 일부 현역 자원병을 지원받아 대대 단위의 부대를 창설했고 스스로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국방차관이 중장이라는 높은 계급으로 대대장을 맡..
- Total
- Today
- Yesterday
- 중소기업
- 빅데이터
- 개정안
- 플랫폼
- 행정안전부
- 교훈
- 지자체
- 시행령
- 개인정보보호
- 입법예고
- 과학기술
- 4차산업
- 인공지능
- 공공기관
- 개인정보
- 인허가
- 코로나19
- 정부지원
- 네트워크
- 행정법률
- 메타버스
- 가이드라인
- 디지털전환
- 감동글
- 행정사
- 정부정책
- 좋은글
- 정보통신
- 마음의양식
- 정보보호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