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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왕융칭(王永慶)'은 1917년 타이베이 근교 신톈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맨손으로 시작해 대만 최고의 재벌이 된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16세에 첫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쌀가게를 하면 굶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시작한 작은 쌀가게는 시작부터

다른 가게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당시 정미 기술이 신통치 않았던 대만의 쌀은 쌀에 섞인 돌을 골라내지 않고 그냥 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돌들을 하나하나 골라내고 '돌 없는 쌀'을 팔았습니다.

더구나 당시에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쌀 배달을 실시하였고 나아가 고객들의

쌀 소비 패턴을 파악하여 쌀이 떨어진 집에 알아서 쌀을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이 같은 '고객 감동'으로 그는 하루 12말을 팔던 쌀을 100말 이상 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일제의 강제적인 쌀 배급제도 때문에 사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서 잘 먹이지 못해 말라가는 가축들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밭에서 수확이 끝난 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배추 껍질과 뿌리를 모으고

정미소에서 버려지는 볏짚과 쌀겨를 사들여 사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농가를 돌며 마른 거위들을 사들인 후 사료를 먹여 통통하게 살을 찌웠습니다.

당연히 그가 키운 거위들은 다른 거위들보다 두 배 이상의 가격에도 불구하고

날개 돋친 듯 팔렸습니다.

그렇게 돈이 모이자 1954년 대만 플라스틱을 창업하여 기업인으로 변신했으며

이후 대만에서 유일하게 '세계 50대 기업'에 들어 '경영의 신'이란 칭호까지 얻었습니다.

남들과는 다르게, 남들보다 앞서서 행동하는 것이 바로 그의 성공의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왕융칭 회장은 검소하기로도 유명합니다.

새 양복 한 벌 걸치는 것을 사치스럽게 여겼고 목욕 수건 1장으로 30년간 쓰기도 했습니다.

전화비를 아끼려고 외국에 유학 간 자녀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면서 우표 값을 아끼기 위해

여러 장의 편지지에 글을 썼습니다.

2008년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돈이란 하늘이 잠시 내게 빌려준 것"이라면서

생전에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혀왔지만,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인한 죽음으로 유서를 남기지 못했습니다.

왕융칭 회장이 대만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가가 된 것은 이러한 품성을 바탕으로 한

능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 따뜻한 편지 제15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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